𝐏𝐫𝐨𝐟𝐢𝐥𝐞 & 𝐂𝐚𝐧𝐨𝐧

𝐍𝐨 𝐎𝐧𝐞 𝐂𝐚𝐧 𝐂𝐡𝐚𝐧𝐠𝐞 𝐭𝐡𝐞 𝐀𝐛𝐬𝐨𝐥𝐮𝐭𝐞 𝐏𝐨𝐢𝐧𝐭.

2023. 7. 31. 06:51

절대 지점은 무슨 수를 써서도 바꿀 수 없어.

 

그렇다면 당신을 만난 순간은 저의 절대 지점이겠네요.



“… 닥터 스티븐 스트레인지 씨!” 

잡상인, 팬, 이상 현상을 목격한 시민일 수도 있겠군. 누가 되었건 대낮부터 성소의 대문을 부서져라 두드리는 배짱을 가진 이는 많지 않을 터였다. 슈퍼 히어로와 셀럽의 경계가 모호한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스트레인지는 빈말로조차 온화하다는 평가를 내리기 어려운 히어로였다. 

그는 깍듯한 매너를 갖췄음에도 모난 구석에 숨김이 없는 사람이다. 이때까지 생텀 생토럼을 통해 스트레인지를 찾아온 이들은 대부분 공포 혹은 실망에 휩싸여 포탈 너머 외딴곳으로 소환되는 최후를 맞았다. 그 이유는 그가 팬을 자칭하는 민간인들을 상대할 인내심을 보유하지 않은 사람이었으며, 유사 과학-이를테면 행운의 주파수를 내뿜는 원석 팔찌라던가-에 진저리를 치는 전직 외과의임과 동시에, 언제나 현세의 예의와 도리보다 우주의 질서를 우선시할 소서러 집단의 권위자라는 데에 있을 것이다. 

관심을 갈구하는 사람에게 무시란 가장 효율적인 대처다. 스트레인지는 안락한 소파에서 일 센티미터도 움직이지 않은 채 검지손가락을 뻗었다. 바닥이 벌겋게 달아오른 주전자가 둥실대며 날아오더니 물방울을 뱉어낸다. 고요하고 능숙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을 따라 찻잎이 분리된 자리를 레몬 한 조각과 꿀 한 스푼이 차지했다. 협탁 위에 놓인 매끈한 도자기 찻잔 위로 김이 모락 피어나자 스트레인지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최근의 그는 끔찍하게 피로한 동시에 믿을 수 없이 공허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다크 디멘션 귀퉁이에서 약 이만 오천 번째의 죽음을 맞이했을 때? 비행 도넛을 타고 외계 행성에 불시착했을 때? 마들렌 턱을 가진 미치광이 타이탄과 칼을 맞댔을 때? 오 년간 먼지로 살아가는 것도 상당히 지루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오갈 곳 없는 원망이 성소의 창문을 두어 개 해 먹었을 때쯤이었을까? 몇 놈을 엘드리치 채찍에 칭칭 감은 뒤 그리니치 빌리지 중앙 표지판 꼭대기에 거꾸로 매달아 두었을 때는 꽤나 후련했다. 그 일이 데일리 뷰글 헤드라인으로 삼 주간 보도되었을 때는 조금 골치가 아팠지만. 그것도 아니라면 역시, 미꾸라지 같은 꼬마와 차원 사이를 굴러다닌 끝에 금지된 마법으로 부패 중인 시체에 빙의했을 때였을까. 모든 것이 끝나고 무너지는 세상 속에서 크리스틴에게 사랑을 고백했을 때인가. 

아. 지나온 시간의 일부분을 복기하는 것만으로도 두통이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아무렴 상관없었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잔해가 남는 법이다. 어벤져스는 뿔뿔이 흩어졌고, 전 차원에서 가장 강력한 마녀는 깊은 잠에 들었으며, 캡틴 마블, 토르와 퓨리는 지구를 비웠다. 은퇴한 모히칸 머리의 활잡이, 새로운-방패로 사람을 내려쳐 죽인 뒤 제명당한 머저리가 아니라, 샘 윌슨을 뜻한다.- 캡틴 아메리카와 비브라늄 팔의 늙다리 슈퍼 솔져, 꼬마 자경단 몇 명, 베스트셀러 작가로 전직한 개미 애호가와 뉴욕을 순찰하는 거미 청년이 그가 인지한 히어로의 전부였다. 사실상 온 지구가 그의 책임 아래 존재한다고 볼 수 있었다. 크리스틴이 물었던 행복이라던가, 후회나 외로움 같은 무른 소리를 할 시간이 없었다. 잠시 떠올린 과거보다 현재에 신경 쓸 일들이 산더미였다. 지금의 그에게는 잔해 속을 파헤쳐 찾아낸 이 짧은 평화가 무엇보다 소중했다.

스티븐 스트레인지는 중요하다고 판단하지 않는 정보들을 무시하거나 잊는 데에 선수였다. 정확히는 관심이 없고 관련이 없는 모든 문장과 장면과 인간들을 의도적으로 퇴출하는 것에 가까웠다. 아무리 좋은 연산 능력을 갖춘 컴퓨터라도 이따금 저장 공간을 청소해 줘야 효율을 유지할 수 있어. 스티븐은 그리 너스레를 떨곤 했다. 소서러 수프림의 반복적인 지적에도 절대 고쳐지지 않는 습관 중 하나였다. 

그렇다. 문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고 있는 불청객은 스티븐 스트레인지가 나름대로 세워 둔 ‘생각하거나 기억할 만한 가치’의 기준점에 한참 미달했다는 소리다. 그에게는 장장 몇십 분간 번뇌에 빠진 채 차를 마시는 일이 외부인을 쫓아내는 일보다 훨씬 중요했다. 한창이던 회상, 자아 성찰, 후회와 연민의 꼬리에 낯선 목소리와 노크 소리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닥터 스티븐 스트레인지 씨.”

하루.

“스트레인지 박사님.”

이틀.

“마스터 스트레인지.”

사흘.

“스트레인지 선생님. 안에 계세요?” 

나흘.

“대화를 하고 싶어요. 십 분, 아니. 더도 말고 오 분만 내어 주실 수 없을까요? 부탁드립니다.” 

평화로운 오후의 침입자가 매일같이 출석한 지 꼭 2주째가 되는 날이었다.

내 이름으로 만들 수 있는 모든 존칭의 경우의 수를 다 들은 것 같군. 조금 남았던 찻물이 입술에 닿는 온도가 서늘했다. 웬만큼의 무시로 포기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지 오래인 스트레인지가 미간을 얕게 찡그렸다. 웡이 있었다면 극성팬이라는 데에 몇 루피를 걸었겠어.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하자 짜증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참을성이 바닥난 스트레인지가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나 대문을 향해 느릿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법으로 생텀 너머를 미리 내다볼 작은 노력조차 기울이고 싶지 않았다.

곧장 한 마디 쏘아붙일 심성으로 문을 열어젖힌 스트레인지의 말문이 막혔다. 저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초췌한 몰골의 여자와 곧바로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사진도, 악수도, 싸인도 요구하고 싶지 않다는 얼굴이다. 정확히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얼굴. 모든 것을 포기하기 직전의 얼굴. 지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표정이었다. 

극성팬은 아니었군. 당황한 기색을 능숙하게 갈무리한 그가 다시금 표정을 굳힌다. 행색을 보아하니 마법으로 개인적인 무언가를 해결해 달라는 부탁일 것이 뻔했다. 꿈 깨고 돌아가라는 의사를 정중하게 표현할 것인가, 그대로 전할 것인가. 빠르게 결정을 마치고 입을 떼려던 그 순간, 서늘한 온도를 유지하던 스트레인지의 낯에 눈에 띄는 동요가 비쳤다. 

눈앞의 여자가 간신히 들어 올린 덜덜 떨리는 오른손에는 아문 지 얼마 되지 않은 커다란 흉터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외부 압력에 으스러진 상처다. 언뜻 보아도 확실한 영구적 신경 손상과 마비, 운이 조금만 더 나빴다면 전체 절단도 무리가 아닐 법한 심각한 부상이었다. 기민한 그는 인공적인 반흔의 아문 정도가 다르다는 사실 또한 곧바로 알아차렸다. 

수술방을 적어도 대여섯 번은 오갔을 것이다. 철심을 이식했나? 신경 치환술을 진행했나? 부자연스러운 손가락의 움직임을 보아하니 감각 신경은 고사하고 운동 신경조차 회복되지 않았다. 신경을 살릴 수 있는 골든 타임을 놓쳤어. 귓가에 크리스틴의 물기 어린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기이할 정도로 선명하게 다가온 과거의 잔상이 불쾌했다.

견고한 벽에 생긴 균열을 감지한 여자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간신히 삐져나온 음성이 얼마 가지 못해 흩어졌다. 수년 전의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한 그녀가 허리를 깊이 숙여 절박함을 표한다. 거절할 틈을 만들지 않으려 억지로 운을 뗀 목소리가 속절없이 흔들렸다.

“무례하게 굴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박사님도 비슷한 일을 겪으셨다고 들었어요. 유명한 신경외과 의사셨고, 교통사고로 인해 두 손의 신경이 손상되셨다는 이야기요. … 그, 늦었지만 정말 유감입니다.” 

스트레인지는 여자의 말꼬리를 자르려던 혓바닥 위 칼날이 그대로 목구멍 뒤로 넘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익숙해진 비틀리고 울퉁불퉁한 손가락이 아주 잘게 떨렸다. 누군가가 자신의 손에 대해 유감을 표하는 일은 아주, 지나치게 오랜만이었다. 으스러졌던 모든 기억들이, 과거의 자신과 함께 수술방에 두고 왔다고 생각한 감정들이, 자르고 꿰매어 억지로 이어 붙인 피부의 모든 곳들이 시큰거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수술과 재활에 차도가 보이질 않자 실종된 뒤 갑자기 마법사가 되어 나타나셨다는 기사도 읽었어요. 히어로가 된 이후 박사님의 손에 대한 이야기가 더 이상 보이질 않아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군. 정신이 번쩍 든 스트레인지의 표정이 느리게 굳어갔다. 신비한 차크라나 숨겨진 비술로 부서진 손을 치료해 달라고 할 작정이라면 당장이라도 쫓아낼 명분이 생긴 것이다. 미스틱 아츠는 우주의 질서와 차원의 평화를 위해 쓰여야 하는 힘이지, 개인의 작은 불편을 해결하기 위한 힘이 아니었다. 그래. 이참에 사이비 신도가 대문 앞에 버리고 간 처치 곤란의 만병통치약 음이온 물병 두 박스를 떠넘기면 딱 좋을 것 같았다. 스트레인지의 말솜씨라면 그게 음이온 물병이 아니라 정수기라도 다섯 대는 너끈히 넘겨줄 수 있을 것이다. 

“박사님의 손이 회복되셨는지 확인하고 싶었어요. 아니더라도, 치료할 수 있다는 작은 가능성이라도 좋아요. 신경 손상과 치료에 대해 어떤 것이라도 발견해 내셨다면…….” 

시동이 걸리기 직전의 혀가 도로 말려들어갔다. 확인? 가능성? 그게 끝인가? 

“……저는 그림을 그려요. 그렸어요. 알파벳을 떼기도 전부터 그림을 그렸지만 오래 방황했어요. 원하지 않는 공부를 하고, 원하지 않는 일을 하다가 이제야 겨우 염원하던 첫 발짝을 뗀 참이에요. 많은 걸 바라지 않아요. 정말 작은 정보라도 괜찮습니다. 제게는 일말의 희망이 될 거예요. 부탁드려요.” 

이 운명의 장난 같은 아이는 내게 돌아온 과거의 편린일까. 스트레인지는 오지랖과는 거리가 멀었던 자신의 과거를 되짚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자신의 외과의 시절을 떠올렸고, 오만의 대가로 얻었던 절망, 배신감, 이어진 자신의 실수와 후회들을 떠올렸다. 그다음으로는 혈혈단신으로 네팔행 비행기에 몸을 싣던 결의를, 수련에 정진하여 되살리던 희망을, 그리고 종장에는 불투명한 미래 속 끝없는 신뢰를 보였던, 냉혹하고 다정한 자신의 스승을 떠올리고 말았다. 

카마르 타지에 처음 발을 들인 내 모습은 어떠했던가.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지 못한 채였지. 믿음으로 몸을 치료한다는 헛소리에 콧방귀부터 뀌었고, 에너지와 영혼 같은 건 없다며 씩씩거렸다. 날 꿰뚫어 보는 것 같다면 착각 말아라, 하지만 나는 당신 같은 사람들을 잘 안다며 언성을 높였지. 그다음으로는…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다. 준비라고는 티끌만큼도 되지 않은 상태로 멀티버스행 급행열차에 탑승했으니. 

눈앞의 여자는 과거의 자신만큼 간절했지만, 과거의 자신보다 몇 배는 점잖고 예의 바른 부탁을 하고 있었다. 사람 하나 겨우 빠져나올 만큼 열려 있던 생텀의 대문 사이가 금속 긁히는 소리를 내며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은인이 쥐여준 수호자의 사명은 숭고했으나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의 얄궂은 운명은 애당초 이러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과 대의 사이의 갈등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그는 늘 대의를 택해왔다. 그 결과로 모든 것을 잃었다기엔 비약이나 포기한 것이 적다고 하기에도 어려웠다.

다크 디멘션과 죽음의 쳇바퀴 속에서 보낸 억겁의 세월, 평생 돌아오지 않을 먼지 속 5년이라는 시간, 눈 감는 순간까지 적막의 모든 순간을 지배할 죄책감.

영영 과거에 묻어둬야 할 평범한 삶, 불가피한 기만과 모순을 향할 타인의 분노, 그리고 다시는 품에 안지 못할 옛사랑……. 

스트레인지는 자신이 치른 희생에 대해 생색을 내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조금은 지나치게 덤덤하고 건조했다. 이는 그가 특별히 고결하고 이타적인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지능을 타고났기 때문이었다.

그래, 옳고 그름의 판단이 필요했다. 음주 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거나, 쌈박질이나 하다 뼈가 으스러진 머저리라면 시간 들여 치료해 줄 가치 따위 없으니까. 스트레인지가 권위적인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까딱 턱짓했다. 

“손이 박살 난 이유는.” 

“…몇 달 전 레녹스 힐 쪽에서 플래그 스매셔 지지자들이 난동을 부렸던 것 기억하세요?” 

“그래.” 

그날은 스트레인지의 기억 속에도 정확히 남아 있었다. 역류하던 차원 간극을 안정화하느라 아메리카와 사흘 꼬박을 디멘션 포켓 사이에 갇혀 있었고, 지칠 대로 지쳐 돌아오자마자 난장판이 된 뉴욕 거리를 목격한 다음 혀를 깨물고 싶어졌으니까.

블립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그 아나키스트들이라느니, 유럽 쪽에서 활동하는 줄 알았더니만 이제 뉴욕에서까지 추종자들이 생겨나고 있다느니… 웡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난 뒤 일주일은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절대다수의 생명을 살리는 것만으로는 평화를 이룩할 수 없다. 눈앞에 그 피해의 증인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테러 중 쓰러지고 다친 사람들의 대피를 돕다가 그 난장에 마지막까지 남아 버렸어요. 그러다 건물이 폭발하고, 잔해에 깔려서……. 조각난 게 손뿐인 건 기적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큰 위로는 못 되더라고요.” 

미련할 만큼 이타적인 이유다. 하지만 과연 정당한가? 나의 개입이 타당한가?

“동정을 사려는 의도는 전혀 없어요. 멍청하고 개인적인 이유라는 것도 알고 있고요. 도움 주실 수 없다고 하셔도 이해합니다. 아무래도 그, 박사님께는 더 중대한 책임이 있으시니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와 달리 문장의 핵심은 정확했다. 사명을 짊어진 그에게는 책임질 것, 지킬 것, 관찰할 것과 해결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대의를 얹은 저울의 무게는 가늠조차 할 수 없으니 셈 놀음에 의미가 없었다. 스트레인지는 이 완벽한 타인의 작은 부탁을 들어주는 데에 소모될 자신의 시간을 어림잡아 계산대 위에 올렸다. 그다음은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 감수할 위험을, 마지막으로는 그 모든 소모에서 오는 이득을. 

“간절하다는 걸 증명해 봐.” 

닫히려던 입술보다 혀끝이 더 빨랐다. 지나치게 영리한 스티븐 스트레인지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한 마디를 인지함과 동시에 자신이 내리게 될 선택이 최선도 차선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거래에 도가 텄을 그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득 될 것 하나 없이 밑지는 장사였다. 하지만 한 번쯤은, 한 번쯤은 괜찮지 않을까. 그의 지독한 독단성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여자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만큼 마법사의 나침반이 흔들렸다.

“그림은 제 전부예요. 이 손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인생에는 의미가 없어요.”

거울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몇 년 전의 나만큼이나 집요하고 극단적인 인간이 하나 더 있을 줄이야. 기다란 체념의 한숨을 내뱉은 그가 잠시간 허공을 응시했다. 

전쟁이 끝난 뒤 많은 사람들은 그를 성자이자 구원자라며 목놓아 찬양한다. 하지만 스트레인지는 열반에 이른 성인(聖人) 따위가 아니었다. 아니, 애당초 그는 규칙과 규범을 반듯하게 지키는 인간조차 아니었다.

다크 홀드를 사용하여 시신에 빙의하는 금기를 저지른 지 얼마나 됐다고, 과거의 안일함을 후회하고 다짐한 지가 얼마나 됐다고 운명은 이런 갈림길을 내어주는지. 하지만 시공간을 뒤틀어 도르마무를 물리친 방법은 안전했나? 토니를 제물 삼아 타노스를 무찌른 일은 반듯했나?

마법사는 눈을 다섯 번 깜박일 동안 사방에 빨간불이 켜진 열두 개의 횡단보도를 건너고, 소리치는 일곱 명의 소서러 수프림을 지나치고, 기울어진 저울을 아홉 개, 다가올 변수들을 스무 번쯤 묵인했다. 질척하게 따라붙는 과거의 그림자를 떨쳐내고 자신을 원망하는 고요한 눈과 입을 하나하나 마주 봤다. 

합리화를 마친 그의 눈이 여섯 번째로 깜빡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결국에도, 그럼에도 그는 스티븐 빈센트 스트레인지였기 때문에.

“… 좋아, 마법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지?”